전남여행

정암 조광조 선생 적려 유허비, 전남 화순 능주

영촌 2016. 1. 13.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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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성찬이 벌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보수 세력의 벽을 넘지 못한

명덕(밝은 덕)과 신민(백성)으로써 표준을 삼았던 정암 조광조의 개혁정치를 생각해 본다.


임금 사랑하기를 어버이 사랑하듯 했고

나라 걱정을 내 집 걱정하듯 했노라.

밝은 해가 이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내 충성된 마음을 환히 비추리라.

정암 조광조 선생 절명시

 

https://youtu.be/R921qvavko0

유적지와 명승지 http://9594jh.blog.me/153598381


조광조 선생은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로 중종을 왕 위에 오르게 한 공신들의 공을 삭제하는 우훈삭제(偉勳朔祭) 등개혁을 단행하다가 훈구파의 모함을 받아 이곳 전라남도 화순 능주에 유배되었다가 1개월만에 사약을 받고 죽음을 당하엿다.

그후 현종 8년(1667) 능주 목사 민여로가 우암송시열의 글을 받아 비석을 세웠다. 전라남도 기념물 제41호

그 자리에 정암 선생께서 잠시라도 살았던 집과 사당 그리고 애우당을 지어서 그 뜻을 밝히고 있다.


조광조 유허지에는 지금은 단장이 되어 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바라보면 얕은 야산을 뒤로 하고 담장앞에 삼문이 있다.


삼문을 들어서면 애우당(愛憂堂)이다 사랑과 근심이 함께 인 것은 임금에 대한 사랑과 나라에 대한 걱정을 담았던 정암 조광조의 절명시(絶命詩)를에서 따온 말이다.

愛君如愛父(애군여애부)

憂國如憂家(우국여우가)

白日臨下土(백일임하토)

昭昭照丹衷(소소조단충)



애우당 정면의 협문을 들어서면 적중거가(謫中居家) 귀양 중 살던 집과 사당 영정당(影幀堂)에는 정암 선생의 영정을 모셨다.






영정당 앞쪽에는 

정암 조광조선생 적려유허비(靜菴趙光祖先生謫廬遺墟碑)

한자를 한글로 옮겨두면 정암 조광조 선생은 알 수 있지만

적려유허비는 뜻을 알기가 어렵다.

적려는 귀양와서 머물던 오두막집, 유허는 옛터, 비는 비석이다.

따라서 정암 조광조(1482∼1519) 선생께서 귀양와서 머물던 쓸쓸한 옛터와 비석이라는 뜻이다.




유허비 번역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 이곳은 정암 조선생이 귀양 와서 별세하신 곳이다. 아, 이제 정암선생께서 돌아가신지 149년이 되었는데도 기묘 학사와 대부들은 그 학문을 사모하고, 백성들과 하급관리들은 그 은혜를 생각함이 더욱 오래될수록 더욱 잊지 아니하고 모두 말하기를 우리나라로 하여금 삼강오륜의 윤리를 알게 하여 이적(되놈)가 금수(짐승)가 되는 것을 면하게 하는 것은 오직 정암선생의 덕택이라하여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엄숙하게 머리 숙여 공경치 아니한 이 없으니라.

이는 그 누군가 그렇게 하셔서 하는 것일까. 그 사람은 누구나 다 양심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 어진 정치를 한 뒤로 수천 년 동안 학문과 정치가 난맥상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포은 정몽주 한훤당 김굉필 선생 등이 나시어 성인의 학문을 밝혔으나 송나라 성리학자 명도 정호 이천 정이 회담 주희 선생 등의 학통을 이어받아 요순의 왕도정치에 뜻을 두어 명덕과 신민으로써 표준을 삼는 자는 정암 선생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여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선생의 휘(이름)은 광조요, 자는 효직이니 한양인이다. 성화임인(성종 13년, 1482년)에 출생하여 정덕경오(중종 5년, 1510년)에 진사장원하고 을해(1515년)에 문과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헌에 이르렀다.

기묘년 11월에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이 밀의하여 주초위왕이 왕이 된다는 무근지설을 조작하여 변을 일으켜 변고가 일어나 즉시 이곡 능주에 유배되니 옥주는 관노 문후종이다.

다음달 12월 20일에 사약이 내려 돌아가시었다. 그로부터 149년 뒤 정미년(현종 8년, 1667)에 능주목사 민여로가 세월이 오래되면 그 유허를 잃어버릴까 두려워하여 그곳에 비를 세워 영원토록 잊지 아니하고자하니 예살 정부자께서 영락정에 글을 지으시면서 물은 차마 이를 폐할 수 없고 땅은 차마 이를 버리지 못한다고 하니 아~ 이글을 이 비에 새김이 합당할지로다.

정미년(현종 8년, 1667) 4월 병진에 후학 승록대부의정부우찬성겸성균관제주세지이사 송시열은 비문을 짓고 정헌대부원임의정부좌참찬겸성균관제주세자시강원찬선 송준길은 비문을 쓰고 통정대부수충청도관찰사겸병마절도사순찰사 민유증은 전서를 쓰다.


정암 조광조 선생의 유허지에서 백성을 향한 그의 마음을 생각해 본다.


정암 조광조 선생 유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