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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

회연서원, 무흘구곡, 성주군 수륜면, 한강 정구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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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번 간 회연 서원
그러나 제대로 보지 못했다
초당에 백매를 심었던
강직하고 청빈한 한강 선생을
그리 쉽게 만날 수 있으랴


서원과 향교 http://work-study.tistory.com/20

여러 번 갔지만 한 번도 제대로 만나지 못한 곳이 회연서원(檜淵書院)이었다. 아직도 왜 회연(檜淵)이라는 이름이 쓰이는지는 모르고 있다.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은 김굉필의 외증손으로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젊은 날 과거를 보러 한양에 갔다가 명종의 외척인 윤원형이 득세하는 것을 보고 시험을 치지 않고, 돌아올 만큼 강직하면서도 청빈한 성품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선조 6년(1573) 천거되어 예빈시 참봉을 거쳐 선조 13년(1580) 창녕 현감에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고 우승지, 강원도 관찰사, 성천부사, 충주목사, 공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경학을 비롯하여 산수, 병진, 의약, 풍수에 정통하였으며 특히 예학에 뛰어났다. 많은 제자를 배출했고 당대의 명문장가로서 글씨도 잘 썼다. 인조반정(1623) 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보통의 서원은 산자락에 자리 잡고 앞으로 강물이 흐르는 경우가 많지만 회연서원은 서원의 뒤편에 봉비암이라는 절벽이 있고 대가천 물이 그곳에 흐르고 있다. 정구 선생은 이곳을 본성회복의 시발점으로 삼아서 회연 초당을 짓고 후학을 길렀다.
후학들이 이곳에 세운 서원이 지금의 회연 서원이다.

회연 서원의 첫 인상은 마당이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리고 보통의 서원이 전학 후묘의 구조를 갖고 있는데 비해 회연 서원은 서원과 사당이 옆으로 나란히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지형 때문이었을 듯하다.

 

앞쪽에 담장에 누각인 견도루(見道樓)가 있지만 후세에 세운 듯하다. 그러나 정원의 나무들과 어울려 선비의 자태를 드러낸다.
담장 밖에 정구 선생을 기리는 신도비는 조선의 문장가인 상촌 신흠(象村 申欽, 1566~1628)이 짓고, 글씨는 김세렴(金世濂, 1593~1646)이 썼다.

 

 

담장 안에는 향현사가 있는데 정구 선생의 외가 식구들을 모신 곳이라 한다.

 

회연서원은 동재와 서재와 부속 건물로 이루어졌고 마루 안쪽 벽에는 ‘檜淵書院’ 현판을 가운데 두고 독특한 글씨체로 유명한 미수 허목(眉叟 許穆, 1595~1682)이 쓴 ‘望雲巖’(망운암), ‘玉雪軒’(옥설헌) 편액이 좌우에 걸려있었다.

 

 

 

옆에 사당은 외삼문 내삼문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고 마당에는 제사를 준비했을 듯한 돌판 성생대가 있었다.

 

 

그 옆으로 숭보제가 있는데 뒤편 건물에는 지금도 후손이 살고 있다. 아주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봄에 매화가 필 때, 가을 당풍이 들었을 때 어느 때 보다 좋다고 한다.

 

내년 봄 다시 올 것을 기약하면서 인사를 드리고, 바라본 백매가 있는 서원의 마당이 아름답다.
견도루에 올라서 정구 선생이 초당을 짓고 매화를 심은 그 뜻을 생각해 본다.

 

 

성주군 수륜면 회연서원